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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의 은행나무가 무성한 숲길을 지나 걸어 올라가면 유려한 기품이 서린 절이 나타난다. 바로 부석사이다.

부석사는 건물의 전체 모양이 극히 경쾌하고 아름다운 고려 시대의 불전으로 정연한 갖춤에 중앙에 돌계단을 놓았다. 평면의 구성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기둥에는 알맞은 배흘림이 안정감을 주며 간결한 공포와 귓기둥에 보이는 깃솟음 수법은 한층 더 건물 전체를 돋보이게 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하고 극락을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의미하며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 5점, 보물 6점, 도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 중 하나이면서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부석사 삼층석탑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인 종파가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조사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바로 이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조사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16년(676)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조사가 왕명으로 창건했으며 의상조사는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 교학을 펴기 위해 귀국해 화엄사를 창건했고 우리나라 화엄 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무량수전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로 676년 창건한 후 몇 번의 중창이 있었고, 조선 광해군 때 단청을 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 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인 것에 비해 이 불상만 동향인 점이 특이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경내에서는 우리의 빛나는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담긴 많은 문화재를 볼 수 있다. 신라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 46호), 고려 각판(보물 제735호)등의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으며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조사당벽화도 현재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선비화

부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로 조사당 앞의 선비화가 있다. 의상조사의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고 하는 이것은 골담초라 한다. 콩과에 속하며 1300년 이상 된 나무로 추정된다. 의상조사가 당나라에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지팡이가 있었는데 의상이 열반할 때 예언하기를 비와 이슬에 맞지 않은 곳에 꽂아 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면 나라에 국운이 흥할 것이라 하여 조사당 측면에 꽂았더니 꽃이 피었다. 그 후로 국운이 흥하고 나라가 태평할 때는 늘 잎이 피고 꽃이 피었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잎이 피었으나 꽃이 피지 않았던 것이 1945년 광복이 되면서 30년 만에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려각판

역사와 문화, 전통의 향기가 가득한 부석사에 들러 선비화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일상에 지쳤던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