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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에가면
  • 등록일2015-06-01
  • 작성자 박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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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에 가면


朴 映 雨


1.

지는 사랑 보내기 전에
우리는 무섬에 가야 한다.

청량리 중앙선 무섬행 기차에 올라

모진 추억 한 장씩 차창 밖으로 흘러 보내며

세상의 저녁 무섬에 오면
은빛 모래밭 어색한 날 반겨주고
내성천 물안개 한숨 토하듯 피어 오른다

짝 잃은 해오라기 날개 짓 뒤로
황혼의 노을빛 볼 수 있고
만죽재 이끼낀 기와장 밑에
옛 슬픈 연가 들을 수 있으리

저물녘 뒷골목 어깨 들썩이던
내 젊은 뒤안길 철지난 흐느낌과
뜰안에 핀 패랭이꽃 다시 기억할 수 있으리


2.

무섬에 가면 나는 알리라
한여름 광풍이 꽃잎을 무참히 떨어지게 하고
겨울 한파가 무서리 치듯 모든 열망들을
빛바래게 하는지를

몸서리 치듯 꿈틀대던
가벼운 육신과 지난한 욕망들이
묵묵히 휘돌아 가는 내성천 같이
도저한 침묵으로 변하는 지를


3.


내 서러운 사랑 그리운 날엔
무섬에 가야한다.
그곳에서 나는 보리라
눈꽃은 어떻게 망울마다 깊은 한숨 담아내는지
저녁 굴뚝은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향 피우며
밤하늘 향해
소리없는 조포 쏘아대는 지를


학가산 긴 그림자 내 어깨 어루만지며
위로할 때
나는 외나무다리 올라서며
수 백년을 낮추고 버틴 시간 위로
고단한 발걸음 내려놓는다
흐르는 물결위엔 위태롭고 불안했던
지난 흔들림과
아른거리며 피어나는
낯선 사내의 창백한 표정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에 들어서서
머뭇 거릴 때
어디선가 가지 말라 외치는 소리
뒤돌아 보면
방죽너머 웅크린 기와집들
숨죽여 날 지켜보는 듯
나는, 휘돌아 흐르는 내성천
마지막 회귀의 몸부림 애써 외면하고
서둘러 발길 돌리리라


4.


떠난 님 지워질까 두려울 때
내 지친 발걸음 무섬까페에 간다.
바랜 옷깃 여미며
진한 커피향 속으로 내 사치스런 안식 들어서면
시인인 여주인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고
말없는 촌장은 수도승처럼 눈을 감고
낯선 이방인을 위한 노래 부르리
어서 보내주라,색즉시공
놓아주라,반야무섬


5.


그 겨울,
사랑이라는 언어를 분실한 채
실성한 듯 길을 나서고
떠난 님 그리워 지친 내 발걸음
무섬 이곳까지 왔으나
이제 더 이상
나를 기억하는 자 세상에 없건만
어찌 그 부재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한단 말인가?
돌아와 다시 무섬 땅에
내 무엇이 무서워 기억 끝자락 부여잡고
차디찬 겨울 강물에 머리 감길 두려워하며
나를 위한 이 망각의 향연에 참가하길 주저하는가


6.

무섬은, 세상을 지우고
시간을 지우며 정지해 버린 곳
스스로 시공간을 유폐시킨
참담한 세월 속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은 아무 말이 없고
하염없는 진눈깨비 만이
어서 떠나라 재촉하는데
아,친구여 나는 도시의 절망에 쓰러지고
환란을 벗삼아 비수를 거두고
지친 영혼 이끌며
무섬 땅에 왔거늘
다시 무섬과 함께
갇히길 두려워하며 떠날 채비를 해야만 하는가?

겨울 강바람 아우성 치고
지난 여름 풀숲에 버려진
소주병처럼
지는 사랑 더욱 희미해져 가는가

무섬,이 애욕의 영지에서는
이제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리라
지난 세월은 그저 묻혀져 가는
헛된 망상일 뿐
애증이라 칭하지도 않으리

어느덧 땅거미 내리고
해우당 아래 서성이는
떠난 자들의 잿빛 그림자.



7.

무섬에 가면 보리라
겨울 백사장의 공허감과
켜켜이 쌓인
그 저항의 잔류물을

저문 날
옛사랑 그리울 때면 무섬에 가야 한다.
그곳에서
세월의 모래톱 속 박제가 되어버린
내 서러운 사랑
떠나 보내리

무섬에 가면...


김 솔 시인 ‘상처가 문이다.’ 출판기념 축시/ 2015.5.30. 영주무섬마을
페이지 담당자문화예술과 김채현 ( 054-639-6562 ) 페이지 수정일 : 2021-08-17 만족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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