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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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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문화재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철도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 정미소, 이발관, 근대한옥, 교회 등 지역의 근대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집적되어 있는 관사골에서 광복로 일대의 거리로서,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으로서 보존과 활용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 자료출처 : 문화재청

일제강점기 당시 영주역 관사로 건립된 2호 연립주택으로 목조 일식관사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 중 하나로 내부공간구성, 외관형태, 구조 및 재료의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고 영주역이 중간역으로서 역할한 것이 영주시가 근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철도집단관사로 조성된 ‘관사골’이 지니고 있는 도시생활사적 보존과 활용 가치가 있다.

※ 자료출처 : 문화재청

구 영주역 5호 관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영주역 관사로 건립된 2호 연립주택으로 목조 일식관사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 중 하나로 내부공간구성, 외관형태, 구조 및 재료의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고 영주역이 중간역으로서 역할한 것이 영주시가 근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철도집단관사로 조성된 ‘관사골’이 지니고 있는 도시생활사적 보존과 활용 가치가 있다.

※ 자료출처 : 문화재청

고택의 원형은 명나라 황제가 자신의 어머니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이석간을 통해 환후가 쾌차되어 그 보답으로 99칸 짜리 본채와 별채 여러 채로 나뉘어진 기와집을 지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본채는 사라지고 ‘안영빌라’가 신축되었으나 1920년에 신축한 개량한옥인 별채는 ㅁ자형으로 정면 7칸, 측면 6칸의 규모의 현재의 상태로 남아있다. 고택의 별채로 한옥 주택의 건축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의원과 하숙집으로 사용되어 일제강점기와 근대산업시기의 생활상이 축적되어 있는 가치가 있는 곳이다.

※ 자료출처 : 문화재청

1930년대부터 광복로 남쪽도로변에서 ‘국제이발관’이 영업을 시작하여 ‘시온이발관’에 이어 현재 ‘영광이발관(이종수)’에 이르는 8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1970년경 시온이발관을 인수하여 현재까지 영광이발관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생활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1950년대 근대산업시기에 건축된 목조+슬레이트 구조의 건축물로서 건축의 완성도는 높다고 할 수 없지만 영주에서 80년동안 지속된 장인의 이용업 생활사를 보여주는 사례로 업계의 변화와 특성 기술을 간직한 근대유산으로서 생활사적 가치가 높다.

※ 자료출처 : 문화재청

근대산업시기부터 운영된 정미소로 양곡가공업의 생성과 양곡 유통에 관련한 역사, 정미소의 건축형식과 설비구조, 도정기기들 외에도 저울(막대저울, 판수동저울) 등 당시의 정미소와 관련된 기구가 현존하여 양곡가공과 곡물 유통의 산업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양곡가공과 곡물유통을 주제로 산업문화관, 쌀카페, 도정 참관 및 판매장으로 활용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 자료출처 : 문화재청

영주 제일교회는 1907년 정석주 집에서 기도 모임으로 시작되었고, 1909년 4월 구성공원 아래쪽 초가 3칸을 매입하여 경북노회에 가입하고 영주교회가 설립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목사와 장로‧전도사들이 구금 또는 옥고를 치렀고, 한국전쟁중에 소실되었다가 1954년 5월 1일 기공 후 신도들의 노역봉사로 1958년 7월 25일 준공된 역사를 지닌 영주지역에서는 유일한 서양의 고딕식 건축양식을 차용한 절충양식의 예배당 근대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근대산업시기를 거치면서 영주시의 근현대사에서 영주시민이자 신도들인 지역 주민들의 삶과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있어 전승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

※ 자료출처 : 문화재청

영훈정迎薰亭은 1460년대 후반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외부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할 목적으로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남정자南亭子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후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1643년(인조 21) 신속이 다시 세우고 이황이 쓴'영훈정迎薰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영훈정은 조선 후기에 보편화 되었던 각 가문의 정자와는 달리 관에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으로 된 누각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하부 기둥은 덤벙주초위에 12개의 둥근 기둥을 3열로 배치하였고 상부는 가운데 기둥없이 10개의 둥근기둥을 세웠는데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마루 끝 가장자리에는 난간欄干을 설치하였다.

학사鶴沙 김응소金應祖의 중건기문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영천榮川의 누정가운데 그 아름다움이 영훈정을 따를 데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아름다운 정자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