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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
  • 등록일2020-02-11
  • 작성자 이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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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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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그리움 가져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 하나 그리워하는 일이

얼마나 가슴 미어지는 애상인지를...

쓸쓸한 삶의 길섶에서도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나고

작은 눈발로 내리던 그리움은 어느새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는 깊은 눈발이 되었습니다.


애매모호한 이 기억의 잔상들.

그리움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리움의 끝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가슴 저미는 사연을 지녔다 해도

고적한 밤에 떠오르는 그대 그리움 하나로

나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돈으로 집(house)는 살 수 있지만 가정(home)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침대(Bed)는 살 수 있지만 잠(sleep)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시계(clock)은 살 수 있어도 시간(time)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책(book)은 살 수 있어도 지식(knowledge)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지위(position)는 살 수 있지만 존경(respect)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medicne)은 살 수 있지만 건강(health)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피(blood)는 살 수 있어도 생명(life)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친구(friend)는 살 수 있어도 친구의 사랑(love)는 살 수 없습니다.





조선 초기 60여년을 관직에 있었고 영의정을 18년이나 지낸 황희 정승은 동시대의 맹사성과 함께 청백리의 귀감으로 후대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황희 정승에게는 수많은 일화들이 전한다.

젊은 날에 들을 지나다가 밭을 가는 농부를 보고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느냐?”고 묻자 농부가 밭 갈기를 멈추고 황희에게 와서 귓속말로 답하여 의아한 황희가 되묻자“ 아무리 짐승이라도 잘못한다는 말을 좋아 할리가 있느냐”고 하는 말을 들은 후로는 평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두 계집종이 다투다가 황희에게 와서 고하는 말을 듣고 각자에게 “네 말이 옳다.” “네 말도 옳다.” 고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조카가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그른 법이지 어찌 둘 다 옳을 수가 있느냐?”고 하자 “응 네 말도 옳다”고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일에 관대했을 뿐 중요한 국사에 임하여서는 시비곡직을 분명히 하여 양영대군의 폐 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되는 등,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으면서도 그의 관직생활 중에는 좌천이 2번, 파직이 3번, 귀양생활이 4년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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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가 병조판서 시절 의정부회의에 참석했는데 자세가 바르지 못했던지 회의가 끝난 후 영의정이던 황희가 큰 소리로 “ 여봐라 병판대감 의자 한쪽 다리가 짧은가보다 빨리 고쳐드려라”해서 깜짝 놀란 김종서가 의자에서 황망히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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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민망하게 본 좌의정 맹사성이 퇴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퍽 관대하신 대감께서 유독 김종서에게는 왜 그렇게 엄하게 하시오” 했더니 “우리는 늙었고 장차 김종서가 뒤를 이어야 할 것이니 그를 바르게 키워야 하지 않겠소.” 했다고 하는 이야기.

고려조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30세(1392) 되던 해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72현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던 황희는 “젊은 자네는 나가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일하라”는 선배들의 간곡한 권유로 두문동을 나와 새로운 정권에 참여했다.

반대 인사였다는 질시 속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태종이 등극한 후로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펴기 시작했다.

그 후 공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태종과 함께한 18년, 다시 세종과 함께한 27년, 그 동안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18년이나 하면서 < 경세육전 >, < 국조오례 > 등을 편찬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내치에 힘써 태평성세를 이룩함으로써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등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했다.

세종 31년(1449) 87세 되던 해에 60여 년간의 관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3년후 90세로 한양의 석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이 문병을 왔다고 한다. 그런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낸 90노인이 멍석자리 위에 누워있었다.

이를 본 왕이 깜짝 놀라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하게 “ 늙은 사람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요즘 억대의 부정한 돈을 받고도 떡값이라고 하는 정치인들은 새겨들어야 할 일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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