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주 문예기행 (수필 3편/시1편) 무섬 -소수서원-부석사
  • 등록일2016-05-12
  • 작성자 이동희
파일
(수필1) 무섬-나의 이니스프리(Innisfree)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의 무섬마을은 '섬계(剡溪)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7세기 중엽에 반남박씨(潘南朴氏)의 입향조인 박수가 이 마을에 들어와 '섬계초당(剡溪草堂:지금의 晩竹齋)'를 짓고 정착하기 시작한데서 유래한다. ‘섬계’에는 사연이 있다. 서기300년대의 중국을 붓끝으로 주름잡았던 명필가 왕희지(王羲之)의 아들로 또한 당대 유명인이었던 왕휘지(王徽之)는 어느 눈 오는 날 밤 문득 거문고의 명인이기도 한 친구 대규(戴逵)를 만나러 섬계(剡溪)로 찾아간다. 그런데 밤새 배를 띄워 대규의 집 문 앞에 이르러서는 불현듯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까닭을 묻는 이에게 그는 승흥이생 흥진이반 하필견대안도야(乘興而行 興盡而反 何必見戴安道耶)라고 답한다. ‘흥이 올라서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대안도(대규)를 만나야만 하리오!” 가다가 흥이 다해 돌아오고 말았다’는 이야기지만, 실은 자신의 감정보다도 ...상대의 형편을 생각하는 이타(利他)의 극치가 내포된 일언이었다.

무섬마을을 걷다보면 무섬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지형이 대규가 살던 섬계(剡溪: 현재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조아강(曹娥江) 상류에 있는 섬)지역의 지형과 비슷한 점에 매우 애착을 가져왔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이곳저곳의 고택의 이름에 '섬계(剡溪)'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죽재(晩竹齋)'의 첫 이름이 '섬계초당'이었듯이, 현재의 '김동근家'도 ‘섬계고택’이라는 이름을 이어받고 있다. 이래저래 '섬계'라는 이름은 '왕휘지'의 배려있는 우정과 따뜻한 만남의 의미를 생각하는 깊은 의미로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섬계를 닮은 무섬에는 그리움과 만남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나무다리'이다. 외나무다리에서 결코 만나지 말아야하는 것이 원수이기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외나무다리는 만남과 필연적인 깊은 관계가 있다. 시집오는 새색시의 유일한 길이었듯이 외나무다리는 바깥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절명의 좁은 외나무다리에도 중간 중간 비켜서있을 수 있는 추가의 공간이 있다. 이 추가의 공간은 바로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양보이다. 바로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서사(恕思)’의 마음인 것이다.

무섬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많다. 경쟁으로 달려가는 현대사회에서 19세기로 타임슬립시켜주는 곳이 바로 무섬이다. 태양이 작열(灼熱)하는 여름 한낮의 무섬마을 뚝길에서 내려다보는 백사장은 바로 김소월선생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가 꿈꾸는 바로 그 강변이 아닌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 빛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작이는 금 모래 빛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화제가 바뀌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나라보다 상대적으로 해외여행 자유화가 빨랐던 일본의 여행업계관계자는 주마간산식(走馬看山式)의 관광을 ‘슬라이드관광’이라고 시니컬하게 표현했던 적이 있다. 어느 나라이건 초기의 여행형태는 여행의 질보다는 방문 장소의 수에 승부를 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을 잘 아는 한 외국인이 세계적인 경제선진국 대열에 오르고도, ‘우리는 아직 선진국대열의 현관에 서있다고 손사래를 치는 한국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어 놀랐는데, 어쩌면 우리나라 국민은 확실히 주제파악을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내심 우리 한국인들은 언제쯤이나 스스로가 선진국임을 인정하고 좀 더 선진국사람답게 여유롭게 될 것인가 끊임없는 의문을 가져본다. 이젠 우리의 관광이나 여행도 좀 더 성숙해져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문득 일본에서 본 고속도로의 과속방지홍보용 간판의 문안이 생각난다. “좁은 일본, 그렇게 서둘러서 어디로 가는가?(狭い日本、そんなに急いでどこへ行く。)”(1973년 일본국무총리상 수상 표어)
이제는 달리기보다는 머무르는 관광의 형태가 도시의 속도전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한 시대가 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모두들 100년 정도 옛날로 돌아가 이곳 힐링의 수도(水島)인 무섬마을에서 슬로 라이프를 즐김은 어떨지. 예이츠(W.B.Yeats)에게 이니스프리 호수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이 있다면 내게는 영주의 무섬마을이 있다. 오늘 비 오는 무섬을 거닐며 생각해본 일이다.

유거당(幽居堂) 이 동 희(李東熙)/2015. 11.08
(계간 미소문학 2016년 수필부문등단작)


(수필2) "소수서원((紹修書院)을 거니는 목민관들"
 
지금부터 십 수 년 전에 상명대 김경일 교수가 지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지만, 공자(孔子)는 이미 2,560년 이상이나 건재하여, 아직도 우리들의 화두 속에 머물고 있다. 공자는 당시의 우리나라가 너무나 도덕적국가여서 조각배를 타고서라도 가고 싶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이로써 나는 공자가 꿈꾸었던 나라가 바로 조선(朝鮮)과 같은 나라였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조선이 없었으면 공자의 사상은 단지 이상(理想)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지나치겠으나, 다름 아닌 우리나라가 조선 5백년을 통해 공자의 설계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현해 보인 나라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지러운 춘추시대를 살았던 공자가 도를 세우기 원한 목적은 인간은 짐승과는 다르게 살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자의 유학(儒學)은 이후 맹자와 순자에 의해 다져졌고,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 초기를 거치면서 ​이전에 갖지 않았던 우주론, 존재론, 인성론 등 치밀한 철학적 체계를 다지면서 재해석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성리학으로 송대의 주자학과 명대의 양명학으로 구체화하여 갔다.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고려 말의 문성공 안향(安珦)선생에 의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조선의 치국철학으로서 관통하여 갔다. 우연한 일일까.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영주시(榮州市)는 조선시대 순흥도호부였고, 안향선생은 이곳 순흥(順興)출신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도 영주출신이고, 역사를 뛰어넘어 안중근의사는 안향선생의 26대손으로 그의 철과 같은 강력하고 뜨거운 애국정신은 바로 수백 년간 핏속의 유전되어 온 선비정신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순흥은 1413년에 순흥도호부가 되었다. 그러나 44년후인 1457년에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과 도호부사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복위인 정축지변(丁丑之變)이 실패하면서 폐부되어 영천, 봉화, 풍기, 안동으로 분할되었다가 12명의 왕이 바뀐 226년후에야 숙종 때에야 다시 순흥도호부가 설치된다. 오랜 세월 동안 순흥은 역적의 땅으로 살아왔으며, 단종복귀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이곳의 순흥 안씨는 조상묘가 없다. 부관참시라는 끔찍한 단어가 있지만, 정축지변 때 그들 집안은 산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조상묘도 사정없이 파헤쳐져 들에 뿌려졌던 것이다. 순흥에서 뿌려진 피는 죽계천(竹溪川)을 타고 남쪽 7키로까지 흘러서야 핏빛이 없어졌다고 하니 그날의 비극은 동촌1리 마을표석에 병기된 ‘피끝마을’이라는 지명으로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역적의 땅으로 짓밟혀 초토화되고 강물을 피로 물들였던 이곳 순흥이 도호부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일까.

정축지변이 있은지 80여년이 지나, 세조이후 4번째 왕인 중종38년, 1543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신라천년의 숙수사 절터에 안향선생을 기리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다. 유교의 가치관 위에 세워진 나라의 조정인들 유교정신을 지키려했던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순흥지역의 선비등과 백성들에 대한 애석함이 없었을까.

주군수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이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백운동서원에 대해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백운동서원은 1550년에 명종의 친필에 의한 새로운 이름인 ‘소수서원(紹修書院)’현판을 비롯하여 토지, 서적, 노비 등 왕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게 된다. 이것이 사액서원의 효시로서, 이후 서원이 국가의 공인을 받아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백운동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된 데에는 퇴계 이황의 영향력과 정축지변으로 희생된 순흥 지역에 대한 조정과 민심의 안타까움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판단하여도 억측은 아닐 것이다. 나는 소수서원에 대한 조정의 사액은  감히 조정과 순흥의 백성들과의 100년만의 화해(和解)라고 해석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조정과 순흥백성들과의 화해에는 훌륭한 지도자인 선비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의 재배를 시작한 풍기군수 주세붕의 성현 안향선생에 대한 존경과 백성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퇴계 이황의 용기와 백성사랑이야말로 조정과 백성사이의 226년간의 시간이 보여주는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백성사랑은 주세봉과 인삼재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산삼을 조정에 공물로 바치던 시절에는 한정된 산삼으로 백성들이 주업인 농사를 짓지 못하고 모두 깊은 산으로 들어가 흔하지도 않은 산삼을 찾아 헤매었다고 하니 그 고초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정조11년(1762)의 강계부사의 장계에는 인삼공납량을 채우기 여렵게 되자 2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주거지를 떠나가 적지 않은 마을이 공동화되었다는 심각한 내용의 보고가 포함되어 있어 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현지에 부임하여 민정시찰을 할 때 마을에나 농지에나 백성들이 보이지 않아 그 연유를 아전에게 물었던 바 모두 인삼을 캐러 산속에 갔다는 대답을 들은 풍기군수 주세붕의 심정은 처연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었던 조선에 주업인 농업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함은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주세붕은 일교차가 큰 소백산일대가 산삼의 서식조건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산삼씨를 채취하여 산삼의 대량재배에 성공한다.   

이렇듯 순흥은 비운도 겪었지만, 다행히 이후 계속 휼륭한 지도자를 만난다. 뜻있는 선비라면 순흥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었을 것이다. 백성을 사랑하여 정축지변 때 불타버린 숙수사의 폐허 위에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듯 주세붕군수는 백운동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역적의 땅에 살아가는 백성들의 긍지를 찾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어 퇴계이황이 군수로 부임한다. 그는 주세붕의 업적에 마음에 박수를 치며 순흥백성의 자존심을 더욱 고양시켜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한 퇴계의 백성사랑이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의 탄생의 배경의 큰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16세의 나이어린 소년 왕 명종은 무슨 생각을 하며 ‘소수서원’이란 글을 썼던 것일까. 작고 아담한 명종의 현판글씨체는 퇴계가 어떻게 조정을 움직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퇴계의 백성사랑은 대장장이 제자 배순과의 관계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당시로는 신분을 뛰어넘는 도강을 하던 배순을 꾸짖지 않고 구두시험을 하고 제자로 거둔 퇴계의 인본주의는 주세붕군수의 백성사랑과 함께 465년이 지난 갑질하는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뜨거운 감동을 전해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소수서원을 바라보며 인본주의와 애민정신에 넘쳤던 아름다운 목민관 주세봉과 퇴계의 서원 어딘가를 히끗 거닐고 있는듯한 환상을 본다. 이러한 환상은 과연 나만의 것일까.  (了)

2016년 4월
유거당(幽居堂) 이 동 희(李東熙)


(수필3) "왜 부석사인가?"

문화유산해설 활동을 시작한 초기의 일이다. 마크 리퍼트 전 미국대사가 영주시 부석사를 찾은 것은 2016년 1월21일 늦은 오후였다. 앞뒤 2대의 검은색 경호차량의 엄호 속에 승용차로 도착한 리퍼트대사는 영주시장 등 요인일행과 함께 주지를 만나고 5시경에 하산했다.

통역안내를 맡았던 나는 일행이 떠나간 후 땅거미가 짙게 드리운 비탈진 부석사경내를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마침 한 겨울이라 하늘은 검푸르고 멀리 소백산준령이 물결치는 지평선에는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었는데, 범종각의 종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 였다. 부석사는 평지에 세워진 사찰과는 달라 태백산의 자산(子山)인 봉황산이 마치 콘서트홀처럼 둘러싸고 있는 절이다. 종각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퍼져 올라가는 범종소리. 그 광경은 나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경치였다. 홍콩의 빅토리아 피크(Victoria Peak)는 그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낮과 밤 두 번 보아야한다는 말이 있지만, 부석사에서 범종소리를 들으며 보는 경관이야말로 그 어떤 실경(實景)음악회보다도 감동적인 것이었다.

한 달에 서 너 번은 부석사에서 국내인과 외국인을 안내하는 나는 부석사에 갈 때마다 문무왕(文武王)을 만난다.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국제적인 군사전략을 통해 물리적으로 삼국통일에 성공했던 신라의 문무왕이 ‘악의(惡意)에 찬 복종’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삼국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염원하여 삼국의 군사전략적 요지에 사찰을 세워 화엄종의 정신에 의해 국민들의 마음을 아우르려고 했던 짙은 고민이 깔려있는 곳이 바로 부석사이다. 비약하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1985년, 에티오피아 빈민구호활동이란 취지로 미국에서 제작된 USA for Africa의 앨범《We Are the World》을 보았다면 문무왕은 아마도 “바로 그 정신이야!”라고 감탄했을 것이다. 죽어서 모두 들어가기 싫어하는 물을 불사하고 해룡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스스로 동해에 수중릉으로 간 문무왕은 참으로 여러 가지 깊은 고뇌를 가진 임금이었다.

지난 6월말 부석사는 전국 각지의 6개 산사와 함께 UNESCO세계유산 ‘산지승원’ 부문에 등재되었다. 선정과정에 있어 가장 강렬한 임팩트를 준 것이 부석사라고 하는 후문이다. 도대체 부석사가 가진 에너지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부석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손님은 고건축을 하는 노교수들이다. 그 분들은 일반 관광객과는 달리 부석사에서 매우 경건한 자세를 보인다. “부석사는 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코스입니다. 여태껏 50번은 더 부석사를 왔나봅니다. 올 때마다 부석사는 항상 새로운 얼굴과 느낌을 줍니다. 끊임없는 가르침을 받는 곳이 부석사입니다.” 그 경건함은 거의 도(道)의 경지이다.

그 말씀에 문득, 고즈넉한 어느 날 부석사를 찾아와 배흘림기둥을 한없이 어루만지며 무량수전과 대화했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고 혜곡 최순우(兮谷崔淳雨)선생이 생각났다. 그 어느 건물이 이렇게 사람에게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부석사에 관련된 분들이 가졌던 고귀한 정신들이 아직도 이 절의 경내에 향기처럼 머물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의상(義湘)대사에 대한 인애(人愛)을 접고 중국 등주(登州)의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져 해룡으로 변해 의상이 탄 큰 배를 등에 업고 비늘이 빠지도록 피를 흘려가며 험한 바닷길을 달려왔던 선묘(善妙)낭자의 그 큰 법애(法愛)의 정신일 것이다. 또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는 문무왕에게 의상이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城)이라고 해도 백성이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라 하자 두 말 않고 즉시 축성을 중지시킨 문무왕의 애민정신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부석사에서도 예외 없이 모든 불교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불교가 가진 태생적 수용성을 만날 수 있다. 불교는 고대인도에서 태어나면서 힌두교를 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천왕문의 사천왕이나 지장보살의 근원에는 힌두교가 깊이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의상대사와 선묘낭자로 표현되는 설화의 이해를 위해서는 해석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을 불교와 동양의 용(龍)신앙과의 콤비네이션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 어느 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삼성각이나 삼신각에도 불교가 전래되면서 우리토속신앙을 감싸 안았던 수용성을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무량수전을 해설하던 나에게 단체의 한 분이 손을 들더니 자못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저는 전자회사에 오래 근무하고 있는 엔지니어입니다. 지금 무량수전 벽면 중앙이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건 바로 ‘곡면 티브이(Curved TV Monitor)’와 같은 원리입니다!” 기술이야 나날이 발전하는 것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겠으나 새삼 무량수전을 만들어낸 조상의 DNA가 흐르는 자손인 우리가 세계전자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사실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문득, 전해들은 부석사 총무스님의 덕담에 부석사를 내려오는 나의 얼굴에는 나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젠 ‘세계문화유산해설사’이시네요!”

유거당(幽居堂) 이 동 희(李東熙)

(시) 부석사(浮石寺)


雲霧 속에 다소곳이 고개 숙인
小白連峰...내려보며,
太白에 둥지 튼
鳳凰의 품속에서
永劫의 歲月을 향해
천오백년을 날아오른
그대浮石寺여!

부처의 뜻은 깊고 길고 넓기에
앞으로도 億劫을날아가야 할
無量壽의 歲月
義湘大師 華嚴의 빛
골짜기와 마을마다펼칠 적에
金삿갓도李退溪도
安養樓에 섰었더라

님의 無限慈悲
鳳凰처럼날아올라
光明의 天地 向해길고 긴 날개 짓을.......

여기 한 衆生
비록 佛者 아니라도
雲海를 내려다보며
大慈大悲그 攝理에
拈華示衆의 微笑.

2015. 11. 24.
유거당(幽居堂) 이 동 희(李東熙)
페이지 담당자문화예술과 김채현 ( 054-639-6562 ) 페이지 수정일 : 2021-08-17 만족도 평가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의견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