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주시 농업기술센터

메뉴열기

영주의 명소

소백산 허리, 구름도 쉬어 간다는 아흔아홉굽이 죽령은 영남과 기호를 넘나드는 길목가운데서도 가장 유서깊고 이름난 중요한 관문이다. 이 고개는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에 신라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개설하였다 하여 죽령이라 불리어 왔으며, 한때는 고구려와 국경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와 조서시대는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들의 과거 길이였고, 온갖 문물을 나르던 보부상들과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죽령소개 중앙선 철도나 중앙고속도로 및 5번 국도를 이용하여 영주 또는 풍기까지 오면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희방사역 입구까지 1일 13회 운행(영주에서 약 40분소요, 풍기에서 약 20분소요)되고 있다. 승용차로는 소백산 죽령고개 또는 풍기 희방사역까지 가면 된다. 죽령옛길 재현행사 죽령옛길 걷기행사 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쫓기고 엎치락 뒤치락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漆夫) 등 여덟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삼국사기)으로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이었음을 짐작할 만한 하다. 서기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길을 이용했기에,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이며,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목목이 늘어 있었다. 장장 2천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 동남지역 교통대동맥의 한 토막이었던 이 길은 근래 교통수단의 발달로 행객이 끊겨 수십년 숲덩굴에 묻혀 있었던 바, 이제 옛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는 뜻에서 '99. 5월 공공근로사업으로 이 길(2.5km)을 다시 열었고 '99. 8월 죽령옛길 안내판(희방사역 및 죽령고개 2개)과 전설안내판(옛길 요소요소에 5개)을 설치하여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가족단위의 새로운 산책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죽령 오시는 길 중앙선 철도나 중앙고속도로 및 5번 국도를 이용하여 영주 또는 풍기까지 오면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희방사역 입구까지 1일 13회 운행(영주에서 약 40분소요, 풍기에서 약 20분소요)되고 있다. 승용차로는 소백산 죽령고개 또는 풍기 희방사역까지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