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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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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영주출신 항일독립투사 故 박제형翁
독립유공으로 정부 건국포장 추서
2004-08-23 11:11:28

o 영주출신의 항일 독립유공자로 널리 알려진 고. 박제형옹이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3부요인 및 차관급 이상 정부인사 등 3,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2004. 8. 15(일) 제59회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이고 일제의 무력 정치에 대항하여 항일운동을 꾸준히 행하였던 독립운동의 공이 인 정되어 정부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

o 고. 박제형옹은 1883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하여 향년 67세로 타계 하기까지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한 흔적이 분명함에 도 불구하고 그간에 유공자 입증에 필요한 증거자료가 불충분하다 는 이유로 지역적으로는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임에도 빛을 보지 못하여 뜻있는 분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여 왔으나 금회 숨은 공이 인정되어 항일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한 고장답게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마침내 그 면모가 들어나게 되었다.

o 공은 고종19년인 1882년 7월, 영주군 문수면 탄산리에서 출생한 박 제형 翁은 학식과 인품으로 인망이 두터워 영주에서 유도청년회, 신 간회 등의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고장의 청소년을 계도하고 항일 독 립정신을 함양시켰다

o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로 알려진 심산 김창숙 翁과 같이 항상 선도적인 위치에서 해방 때까지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그의 항일 투쟁사를 살펴보면, 영주의 유림청년회(1919~1935)를 결 사조직하고 각 부락에 야학회를 설립하여 항일 반일의 사항을 주 입하였으며 양조장과 인쇄소를 경영하여 그 자금을 제공하면서 회 장으로서 솔선 활동하였다.

o 일본 침략자들의 만행을 규탄하고 자주와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를 파리의 만국평화회의(1919년 1월)를 통해 전파할 목적으로 곽종석, 이만규, 권상익, 김동진, 김창숙 등과 계획을 추진하다가 발각되기 도 했다. 또한 박제형 翁은 인쇄소를 경영하면서 결사와 계몽운동 을 하다가 발각되어 100여명과 함께 체포, 구금되어 성산 형무소에 서 3개월 복역하였으며, 김창숙 등과 독립자금 모금조직에 활동하 다가 발각되어1926년 체포 구금되어 성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 던 중 1927년 2월 대구지방법원 공판에서 면소석방되었다.

o 한편, 박제형 翁은 신간회(1928~1930)를 조직하여 김창숙, 정규창, 김화진 등과 영주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차후에는 영남의 명사들 과 더불어 성동(成東)이란 결사를 맺어 산수에 거닐며 자적하다가 1948년 7월7일, 향년 67세에 사망하였으며, 후손으로 박승억(68세, 전 영주시공무원)씨가 영주에 거주하고 있으나 당시 독립운동이라 는 것이 숨어서 하는 일이었기에 외경의 삼엄한 가택수색이 빈번 하였던 터라 조부의 독립운동에 관한 모든 문건과 증거물은 멸실 되었고 그나마 역사적인 기록에 조부의 행적이 남아있는 것만이라 도 다행이라고 술회한다.

o 독립운동가는 일제에 항거 하다가 순국하거나 항거사실이 있는 자,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것은 사회적인 제도장치를 통 해 그들의 유족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서 현재, 정부에서 지 정한 국내의 독립유공자 대상 자격은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전후 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 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 한 자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로 규정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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