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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면 지명유래

이 표는 문수면 지명유래를 리별, 자연부락, 유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리별 자연부락 유래
승문1리 막지고개·막현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아늑한 마을로서 마치 막을 쳐 놓은 것 같다하여 막현 (幕峴)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부근에는 장군봉(將軍峰)·장막 등의 지명이 있고 난(亂)을 피할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6.25당시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난을 피하기도 한 곳이다.
버드랭이·유릉·유천 전주 류씨(全州 柳氏)가 이 곳에 묘를 쓰게 된데서부터 유천(柳川)이라 불렀다. 한편 류자(柳字)를 따서 버드랭이라고도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점골·점촌 막현(幕峴) 동편 산 모퉁이에 위치한 4,5가구의 소집단 자연 부락이 형성된 후 이 마을에 처음으로 주막이 생기게 되자 점골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한다.
승문2리 도래·석천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여러 해에 걸쳐 흐르는 동안 흙은 파여 흘러가고 돌만 많이 남게 되자 돌 많은 내라는 뜻에서 돌내로 오래 전해 내려오는 동안 돌내가 도래로 발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걸가 냇가에 4,5가구가 살게 되자 마을 이름이 내가 있는 마을이란데서 유래되어 전(傳)되어 오는 동안 거렁가에서 걸가로 불리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8가구의 농가가 특용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봇목 냇물에 의하여 흙이 파여 골을 이루게 되자 보를 설치하고 수로를 만들어 농사 짓기가 편리해졌다. 이 때 보 입구에 4,5가구의 농가가 형성되자 이웃 사람들이 보의 목에 있다 해서 봇목이라고 했다.
만방1리 한정이·한정 돌과 돌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샘물이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물맛이 좋고 그 물이 차다하여 한정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자마이·자만 지형적인 잇점으로 임진왜란 때 은거지(隱居地)였다고 하여 그 후 인근에 산재해 살던 난민들이 피난 처로 생각되어 이곳에 모여 살다 보니 어느덧 큰 동리가 형성되어 골 안에 주택이 꽉 차게 되었다하여 자만(自滿) 또는 자만(者滿)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릉이·종릉 조선 태종이 등극 전 류씨(柳氏)성을 가진 친구와 함께 글공부를 했었는데 등극 후 친구 류씨(柳氏)에게 조선 개국에 대한 협조를 구했으나 류씨(柳氏)는 이를 거절하고, 지금의 이 곳에 내려와 종산서원(鐘山書院)을 세우고 글공부를 하다 죽었다. 그 소식을 듣고 태종이 친구와의 옛정을 기려 柳氏의 묘를 능으로 칭하도록 하였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을 종산서원(鐘山書院)의 종자(鐘字)와 류릉(柳陵)의 능자(陵字)를 따서 종릉(鐘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랫마 새뱅이란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 입구에 오래된 고목이 있었는데 이 고목(古木)을 중심하여 그 아래에 마을이 생기게 되자 이 마을을 새뱅이 사람들이 아랫마라고 부른 것이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되고 있다.
양지마 새뱅이 마을의 중간에 작은 개울이 있다. 이 개울을 중심하여 양지쪽에 위치하고있는 마을을 양지마라고 하는데 20여 가구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이다.
음지마 양지마의 뒤쪽에 마을이 형성되자 음지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음지마을이라 이름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만방2리 새배이·쇄배이·새뱅이·신방 임진왜란 때 순흥 안씨 영양남씨 양성(順興 安氏 英陽南氏 兩姓)이 입주하여 은거하던 곳이며 마을 입구에 반석 (盤石)으로 둘러싸인 곳에 사방 1m되는 자연석정이 있다. 이 석정(石井)의 청량수가 현재까지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영가북방(永嘉北方) 70리에 화개지지(花開之地)가 곧 신방(新芳)이라하여 쇄배이라고 하였다 한다.
우무실·우곡 임진왜란 때 인명(人命)과 재산이 모두 피해 없이 세(世)청출입(出入)을 피(避)하며 우인자처(愚人自處)라여 우곡(愚谷)이라 칭하다가 무우세거(無憂世居)함에 우무(憂無)실이라고 하였다.
적동1리 적동 본래 영천군(榮川郡) 적포면의 지역으로서 적벽바위 동쪽이 되므로 적동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적서동 일부와 권선면(權先面)의 월호동 일부를 병합하여 적동리라 해서 영주시 문수면에 편입되었다.
본마·보팔 현재 문수 중부초등학교 뒷산 구릉성을 보팔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4,5가구가 형성(形成)되자 산구릉 이름을 따서 보팔이라고 불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양달몰·음달몰 원래가 사느래였는데 사천(沙川)이라고 부르개 된 동기는 마을 중앙으로 사천(沙川)이 흘러 사(沙)와 천 (川)의 음(音)을 따서 사느래라 하였으며 한씨(韓氏)가 먼저 이 마늘을 개천하였으면 그후 임씨(林氏)가 이어 이 마을에 살게 되면서부터 양달몰이라 이름하였으며, 양달몰은 사느래 북쪽에 있는 마을을 말하며 남쪽에 있는 마을을 음달몰이라 하게 되었다.
사느네·사천 마을 중앙으로 사천(沙川)이 있어 사자(沙字)와 천자(川字)의 음과 뜻을 따서 사느네라 한다. 약 200여년 전에 한씨(韓氏)가 먼저, 그 다음 임씨(林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적동2리 장바우·장암·장암 400여 년 전 선성 김씨(宣城 金氏)가 이마을을 개척했으며 큰 바위가 있어 장바우라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후 장암(莊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별·적벽 마을 옆 붉은 바위를 적벽암(赤壁岩)이라 했고 적벽(赤壁)이 다시 제별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다.
탑거리·탑동 마을 안에 문수원(文殊院)과 절이 있었는데 절은 유실(流失) 매몰되었고 절의 5층 탑은 부분별로 어디론가 옮겨졌다. 그 탑이 길목에 있었다 하여 탑거리라고 하였다.
재별·적벽·제벽 1910년 직후 현 문수면 적동리 속칭 탑거리 입구에 붉은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를 적벽암(赤壁岩)이라 하였으며, 이 적벽(赤壁)이 다시 제벽(齊壁)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바위를 깃점으로 하여 남원천(南院川)을 경계로 동쪽을 적동(赤東), 서쪽을 적서(赤西)라 부르고 있다.
권선리 고란골·고란곡·난곡 본래 영천군 권선면(榮川郡 權先面) 소재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권선동(權先洞)이 되었다. 옛 박난고 선생(朴蘭皐 先生)이 난고서당(蘭皐書堂)을 짓고 한문(漢文)을 가르쳤다 하여 난고서당(蘭皐書堂)의 고자(皐字)와 박란구 선생(先生)의 첫 이름자 난자(蘭字)를 따서 고란골이라고 했다 한다.
뒷골·후곡 고란골 마을이 형성된 후 뒷골에 또 마을이 형성되자 고란골 사람들이 뒷골이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누루실·황곡 을이 형성된 후 동리 사람들이 계곡(溪谷)의 흙 색깔이 다른 곳보다 유달리 황색이어서 누루 황자(黃字)의 음을 따서 누루실이라고 마을 사람이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선발 옛날 난곡동리(蘭谷洞里)가 형성되기 전에 난곡(蘭谷) 동쪽 좀 떨어진 곳에 권선발이란 작은 마을이 있었으나 장구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마을은 없어지고 이곳 주민들은 고란곡으로 모여 살게 되고, 지금은 경작지로 변해 버렸다.
월호1리 다락골·월곡 마을 뒷산 형국이 반달 같아서 지은 이름이다. 상월(上月)은 살림이 번창하다가 보름이 지나면 차차가세가 기울어져 3대를 못 넘긴다고 하며 정월대보름날 달을 먼저 보면 그 해 운수대길(運數大吉)하여 총각·처녀는 장가가고 출가한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주안·성잠동 옛날 이 곳에 숲이 우거져 있었다. 하여 한 동안 수안이라 불려 왔으나 1943년에 처음 입주한 주민들이 양잠을 많이 했으며 마을 뒷산인 잠두산(누에머리 살)의 잠자(蠶字)를 따서 지금은 성잠동(盛蠶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월호2리 기와고개·개와고개·와현 이 마을에는 조선조 중엽에는 기와를 구워서 인근 동리에 팔아 생활했다고 하며 지금도 동시에 찰흙이 많고 기과굴의 흔적이 있다. 와현(瓦峴)은 문수면(文殊面)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새마을·새마·신촌 수도(水島)에 살던 선성김씨(宣城 金氏)의 일부분이 농토를 따라 새마을을 이루어 살았으므로 새마을·새마·신촌(新村)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13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업이 농업이다.
월호3리 원정골·원창 고려 때 원창(元昌)이란 고을 원이 살았다고 하여 그로인하여 골 이름을 원창(元昌)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지금은 원정골이라고 부른다. 원정골은 각성(各姓)이 모여 취락을 이루어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대양1리 전닷·전도· 도촌 조선조의 명의 이연간(名醫 李硯幹)이 명나라 황제의 병을 고쳐 주고 돌아왔으며 이에 우리 조정에서 이연간 (李硯幹)에게 대청(大廳)을 건축해 주었으며 수대(數代)를 거처하다가 손서(孫壻) 황세평(黃世平)에 넘겨 주고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반상(班常)의 구별이 심하며 나씨(羅氏)·조씨(趙氏)·신씨(辛氏)·권씨(權氏)등이 살고 있다.
대양2리 문고개·문현 지금 43가구가 살고 있으며 옛날에 문수암(文殊庵)이라는 사원(寺院)이 있었다고 한다. 서편에 대문이 있었는데 자주 열지 않았다고 하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무(武)보다 문(文)을 숭상한에 그 고개 이름을 문고개라고 하고 마을 이름을 문현 (文峴)이라 부르게되었다 한다.
궁터·궁기 뒷산맥이 활같이 생겨서 궁터라고 하며 대궁·소궁(大弓·小弓)이 있고 주민 다수가 정감록 신자(信者)로 모인 촌락이며 6.25격전 때에도 이 마을에서는 한 사람도 궂은 일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꽃뱅이·화계·화방 지금부터 500년 전에 안동 권씨(安東 權氏)들이 뒷산에 묘를 쓰고 그 산이 꽃망울 같다고 하여 화방(花芳)이라고 부른 것이 지금은 꽃뱅이라 부른다고 한다.
탄산리 머름·머럼·원암 지금부터 약400년전 박경승이라는 선비가 개척했다고 한다. 크고 작은 암석이 흩어져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기이하여 원암(遠岩)이라 일컬었으며 지금은 머름 또는 머럼이라고 부르고 있다.
술미·하탄 지금부터 약300년전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개척했으며 서쪽을 뒤로 하여 동향으로 집을 짓고 농주를 빚어 먹어 보니 술맛이 별미여서 술맛을 따서 酒味라고 일컫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주(酒)의 뜻을 따서 술미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다. 하탄 (下炭)이라는 동리는 동일 지역이며 옛날에 숯을 굽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 해서 하탄(下炭)이라 일컫고 있다.
몽동골·무동골·무동곡 아이가 춤추는 형용(形容)이라 하여 무동곡(舞童谷)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와전되어 몽동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현재는 두 가구만 살고 있다.
수도리 무섬·수도 약1666년 박수라는 선비가 개척하여 손서(孫壻) 선성(宣城) 김씨(金氏)를 불러 같은 동리에서 생활 (生活)하게 하였다. 내성천(乃城川)과 남원천(南院川)이 합류되는 곳이며 동리 뒤에는 가파른 산이 있고 삼면(三面)은 강으로 싸여 섬같이 되었으므로 수도(水島)라고 부른다. 수도리(水島里)에는 농토가 전혀 없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소드리·송평 무섬에서 강 하류로 약 1.5km쯤 내려간 곳에 위치하여 각성(各姓)이 살고 있는 마을이 송평(松平)마을이며 지금은 소드리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조제1리 분계 달성 서씨(達成 徐氏)가문의 한 선비가 약 50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삼계·멱실·샛골·잔도리 가는 분기점(分岐點)이라 하여 분계라 칭하였다.
잔도리·작평 약 500년 전에 청풍 김씨(淸風 金氏)가 많이 살던 곳이며 이 마을이 본 지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계곡이 긴 관계로 올라 오면서 사닥다리와 같이 밟고 올라와야 하므로 사다리를 밟는 동리라 하여 잔도리라 일컫는다. 사이골·샛골·간곡 약400년 전에 반남(潘南)박씨가 살았던 곳이며 현재도
사이골·샛골·간곡 약 400년 전에 반남(潘南)박씨가 살았던 곳이며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잔도리와 분계의 두 마을 사이에 위치한다 하여 사이골이라 한다.
조제2리 멱실·이곡 약 300년 전에 경주 김씨(慶州 金氏)와 예천 임씨(醴泉 林氏)가 내성천(乃城川)연안에 12실의 피난처 (避難處)가 있다하여 양성(兩姓)이 이 곳에 정착했다. 실字 든 곳을 찾았다고 해서 멱실이라 한다.
세거리·삼계 약 200년 전에 영해 박씨(寧海 朴氏)가 입주하였으며 금영골·화방·乃城川 3개 골의 물이 합수가 되어 흐른다고 하여 세거리라 한다.
금영골·금영곡 약 300년 전에 예천 임씨(林氏)가 입주하여 살았으며 금영골의 본명은 못이 있다하여 금연곡(今淵谷)이라했으며 그 후 금영사(今寧寺)가 있었다고 하여 금영골이라 칭하였다.
페이지 담당자문수면 정소원 ( 054-639-7503 ) 페이지 수정일 : 2018-08-01 만족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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