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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현면 지명유래

봉현면 지명유래
리별 자연부락 유래
두산1리 주치골
  • 주치골(朱致谷)-약 400여년 전 조선조 명종때 남사고란 사람이 뒷 산목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하며 사고막재 라고 불리운 고개가 있었다 한다. 이 고을에서 생산품으로 두류(豆 類)가 많이 생산되어 두치(豆致),두치(斗致)라고 하였고 질그릇을 칠하는 주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주치(朱致)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재는 주치골로 불리고 있다.
두산2리 소 미
  • 소미-구한말 이지역명이 풍기군와룡면우산리(牛山里)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영주군 봉현면 두산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우산리 즉 소우(牛)자의 “소”자를 따고 뫼산(山)자의 “뫼”자를 따서 “소뫼”라고 부르게 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와전이 되어 “소뫼”가 “소미”로 되었다 한다.
수용골
  • 수용골(水龍谷)-1850년도부터 주민들이 살게 되었으며 모양이 용 같이 생긴 곳에서 물이 솟아 나와 흐른다하여 마을을 수용골이라고 불러 왔다 한다.
두산3리 홍정골
  • 홍정골(洪井谷)-옛날부터 홍정골이란 기러기 홍(鴻)자,머무를 정(停)자로 썼는데 어쩐 일인지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고민 했었는데 어떤 무명의 대사에 의하여 마을 이름을 넓을 홍(洪)자 우물 정(井)자로 개명했더니 화재의 빈도가 현저히 줄어졌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홍(洪)씨가 바위 밑에서 맑은 물이 나온다는 우물 곁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나막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한다. 그 사람이 어쩐일인지 5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이 우물에 백일 정성을 들여 생남 하였는데 그 태몽에 용의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 바위를 용수암(龍水岩)이라고 하였으며 그 우물에 자신의 성을 따라 홍정(洪井)이라 이름 짓고 마을 이름도 홍정골이라 불러 왔다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본 마을 앞에 숲이 있었고 앞들에 철따라 기러기와 학이 이 숲과 들에 날아와 가관을 이루어 홍정골(鴻停谷)이라고 불었다 고도 한다.
꺼치네
  • 꺼치네-홍정골에서 동(東)으로 약 700m 거리에 위치한 마을로서 홍정골 뒷산 마늘봉에서 산 능선이 쭉 길게 뻗어 지경터까지 연하였고 그 야산에 쌓인 외딴 마을이다. 서(西)로는 도솔봉이요 북(北)으로는 소백산 줄기로 내려온 금계바위를 앞으로 보고 있다.
    1900년경 봉화 해저에서 이주 해온 의성김씨 창원(昌遠1879-) 호는 도은공(도솔봉 하(下)에서 은거하여 살아 간다는 뜻)께서 이마을을 신개척하여 샛터(新基洞)라고 하였으며 이 마을에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솟는다 하여 거천리(巨泉里 또는 居泉里)라 하였다가 1980년경에 와서 “꺼치네”로 와전되어 좋지 못한 음감이라 하여 이름을 서로 친(親)하고 사랑(愛)하는 뜻으로 살아가고자 거친애(居親愛)라 칭하였다 한다.현재는 꺼치네라고 불리고 있다.
지경터
  • 지경터(地境터)-주치골과 수용골 방향에서 흘러 내려오는 냇물이 지경터에 이르러 하천 양쪽에 산재해 있는 마을을 지경터라 칭한다.하천을 경계로 서북편은 행정구역산 두산2동에 속하고 하천 동남편은 두산3동에 속한다. 1856년 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인근 마을 남원촌(南院村)과 떨어져 경계를 이루는 곳이라 하여 지경터라고 칭하였다 한다.
오현1리 남 원
  • 남원(南院)-남원은 풍기군 당시 행인과 관원들이 유숙하는 국영여인숙(國營旅人宿)이 풍기 남쪽에 위치하여 남원이라 불렀다.
까치섬
  • 지형적인 잇점으로 임진왜란 때 은거지(隱居地)였다고 하여 그 후 인근에 산재해 살던 난민들이 피난 처로 생각되어 이곳에 모여 살다 보니 어느덧 큰 동리가 형성되어 골 안에 주택이 꽉 차게 되었다하여 자만(自滿) 또는 자만(者滿)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현2리 엄고개
  • 엄고개-오향골 서쪽에 있는 긴 고개 이름이 엄고개인데 그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엄고개라 불렀다. 이 마을은 약 700년 전에 도씨(都氏)라는 선비가 이 곳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마을 앞에 있는 동산을 넘어서 마을에 들어온다고 엄고개라 불러 왔다고 한다.
자갈모래이
  • 자갈모래이-오향동 북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서 자갈이 많고 뒷산에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밤수산골, 자갈모래이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오현3리 오향골
  • 오향골은 오현동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모양이 외양간과 같다하여 오향골이라 불렀다 한다. 또 이골은 약 480년전에 오향사(梧香寺)라는 사찰(寺刹)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인하여 없어졌다. 그 후 오향사 절 이름을 따서 오향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현동으로 개칭되었다.
오현4리 뒤밭
  • 뒤밭-오현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띠(잔디)가 많이 나는 밭이 많아서 띠밭이라 불리웠다. 옛날 문경과 충주로 왕래 하는 과객을 숙박시키기 위한 마방(馬房)으로 하여금 마을이 형성되고 개척 되었다고 전한다.
윗뒤밭  
대촌1리 와룡골
  • 와룡골-용감동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모양이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룡골이라 하였다 와룡골이라 하고 면 이름도 와룡면이라 칭하였는데 마을이 크므로 큰 마을 또는 대촌(大村)이라 하였다. 마을 한복판에 흐르는 석평천(碩坪川)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 양지쪽을 양지마을, 남쪽을 음지마을이라 하였다.이 마을은 예전에는 땅이 아주 메마른 곳으로 불모지로 내려왔다. 그 때문에 일명 갱변마을이라고도 하고 방아두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동으로 희나무 고개와 영등 바위가 있고 희나무 고개에는 큰 희나무와 노송이 있어서 희나무 고개라 하였으며 영등 바위에서는 영등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여 온다.
백부이
  • 백부이-백부이는 이곳에 밀이 잘 되어 밀가루를 많이 생산한다 하여 백분 또는 백부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아래 백부이는 안정면 생현동으로 편입되고 윗백부이는 봉현면 대촌동에 속하고 있다.
대촌2리 주성골
  • 주성골(珠星谷)- 용이 와룡청수에서 물을 마시고 주성동에서 여의주를 얻은 형상이라 하여 주성동이라 하였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약 340년 전에 광산김씨의 선조인 진현(振鉉)이란 사람이 다래 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주성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촌2동으로 분동되었다.
한천리 샘골
  • 샘골-집집마다 샘이 있어 샘골이라 칭하였다.본래 풍기군 와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한동(水寒洞),천동(泉洞),대촌동(大村洞)일부를 병합하여 수한과 천동의 이름을 따서 한천동(寒泉洞)이라 하였다.
무래이
  • 무래이- 한천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물이 매우 차다하여 물한이라하고 또 무래이라 불러왔다. 마을 위쪽에 위치한 마을을 웃무래이라 부르고 있다.
윗무래이  
유전1리 주막거리
  • 주막거리-진밭 남동쪽에 있는 이 거리 마을은 예로부터 진밭, 버드래이, 짤드매기, 점말로 가는 분기점이며 풍기에서 예천으로 통하는 행인이 많아 객주집 비슷한 주막이 잇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리어 왔다. 마을에 큰 노송이 있기 때문에 송정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진밭
  • 진밭-옛날부터 마을주위에 진흙밭이 잇어 일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진밭(泥田) 또는 이전동(泥田洞)이라 칭하였다.
유전2리 힛트재
  • 힛트재-힛트재라고 이름지어 부르게 된 연대는 미상이나 처음에는 시령(尸嶺)이라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힛트재로 변했다고 한다. 처음의 시령이라 이름 지어진 것은 그 재의 서편에 둥지리 봉이 있고 그 밑에 약물탕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처녀가 그 약물을 먹고 재에 와서 까닭 모르게 죽었다 한다. 그래서 시령이라 이름 짓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현판명을 영왕(靈王)이라 서 붙이고 인근 마을에서 매년 무사고를 빌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집없는 마을로 수백년이 지나오다가 1900년 초부터 인근에서 한집두집 모여 들기 시작하여 재말, 힛트재말이라 불렀다.
버드래이
  • 버드래이-옛날 버드나무 그늘이 좋아서 유음동(柳陰洞) 또는 버드래미라 칭하였다.버드나무 둘레가 약 10m가량 되며 높이도 약 20m정도 되는 큰 버드나무가 있어 여름의 휴식처가 되었으며 인근 마을의 힘센 장사들이 모여 씨름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짤드매기
  • 짤드매기-건너마을에서 보면 마을 바로 뒤에서 달이 뜨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달뜨매기 또는 월현(月峴)이라 불렀던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음이 변하여 짤드매기로 불리고 있다.
노좌1리 노재이
  • 노재이-약 800여년전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전하여 오나 개척인물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산 주마산밑에 마부가 살았는데 이 마을 이름이 노자(奴字),자자(者字)로 전해 왔는데 약 250년전 진성이씨 경활이라는선비가 동명 (洞名)이 상스럽다하여 노자(奴者)를 노좌(魯佐)로 바꾸었다고 한다. 노좌라는 명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재이라 하였다.
노좌2리 사리미
  • 사리미-고려말 한추월(韓秋月)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뒷산 형세가 “白”자 모양이어서 백산이라 칭하고 마을을 백산동이라 칭하였다. 그후 조선조 말에 김경업(金敬業)이라는 선비가 추월공이 독서를 하였다 하여 사림리(士林里)라 하였다. 현재는 사리미로 불리고 있다.
새 말
  • 새말-사리미 마을에서 디리목 마을로 가는 우측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1905년경 입주자가 생기기 시작하여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새말(새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노좌3리 추월당
  • 추월당(秋月堂)-조선 중엽 자구산 중턱 다래덩굴을 헤치고 처음 이곳 피난지를 찾아 은거한 사람의 성은 한(韓)이요 호는 추월(秋月)인데 추월당을 짓고 훈학도 하였다는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추월선생의 호를 따서 추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리목
  • 다리목-옛날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자구산과 천부산 골자기에 약초 캐는 사람이 산삼을 캐러 왔다가 마을골 안이 다래기 같이 생겼다고 다래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처음 이골을 개척할 때 많은 다래 숲을 헤치고 개척하여 다래가 많은 골이라하여 다래골(多來村)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으며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었다 하여 다리목으로 불린다는 설도 있다.
중 말
  • 중말-동네를 양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있어 전란 때 피난지로서 적합한 곳이라 하여 생긴 마을로서 추월당을 중심으로 해서 산중간이며 상말과 추월당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말(중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촌1리 하 촌
  • 하촌(下村)-본래 풍기군 노좌면의 지역으로서 옛날 이 마을에 큰 못이 있어 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꽃마을이라 하여 화촌(화촌)이라 부르다가 그 후 노좌동에서 볼 때 아래쪽에 있다하여 하촌이라 하였다.
한 티
  • 한티-하촌에서 예천군 하리면 탑리로 넘어가는 한티재 밑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해발 7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기온이 냉하나 산능선을 따라 이 마을에 이르면 땀을 흘린다 하여 한현(汗峴)이라고 하였다 한다.
하촌2리 배 골
  • 배골(梨谷)-마을 뒷산이 고무산인데 중턱에서 양쪽으로 뻗어 내린 도장골에 참배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하여 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배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배골이라고도 한다.
쟁피밭
  • 쟁피밭-제방에 쟁피초가 무성하여 쟁피밭이라 불렸다.
새터말
  • 새터말-주마산 기슭 서향지의 아늑한 이곳에 약300년 전 새로운 터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새터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촌3리 배리들
  • 배리들-이 마을의 지형이 벼루처럼 생겼다 하여 벼루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배리들로 변하였다.봉현면과 감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경터와 통틀어 배리들이라고 부른다.
페이지 담당자봉현면 이윤재 ( 054-639-7614 ) 페이지 수정일 : 2016-04-06 만족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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